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필연적 동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필연적 동거
  •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 승인 2017.11.03 0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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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바람 “불편하지만 괜찮아”

[더피알=이윤주 기자]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아날로그는 디지털에 하나 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는 구태의연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무조건 디지털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차가운 디지털에 따듯한 감성을 결합한 ‘디지로그’가 다시 뜨는 이유다.

‘페이퍼리스 포스트(Paperless Post‧종이없는 우체국)’라는 회사가 있다. 온라인 초대장을 만드는 곳이다. 이름처럼 종이 없는 회사를 지향해왔으나 소비자로부터 오프라인 초대장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에 시달렸다. 결국 원칙을 접고 종이 제품을 선보였다. 제임스 허슈펠드 대표가 “지나고 보니 우리 회사의 이름이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에버노트’ 역시 디지털 노트의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했으나 디지털만으론 한계에 부딪혔다. 유명 노트 브랜드 ‘몰스킨’과 손을 잡고 실물노트를 제작했다. “몰스킨과 제휴하면서 우리는 종이와 휴전을 선언했다”는 말과 함께.

최근에는 옛날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모바일 카메라 앱 ‘구닥’이 인기다. 출시되자마자 국내 앱스토어 유료 부문 1위를 기록했다. 구닥의 사용법은 이름처럼 구닥다리다.

(위) 카메라 어플 '구닥'과 구닥으로 찍은 사진,

피사체는 필름카메라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확인해야 하고, 필름 한 통은 24장으로 한정돼 마음대로 찍을 수도 없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인화가 가능했던 예전 그대로 3일이 지나서야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으며, 겨우 획득한 사진의 색감 역시 빛바랜 느낌을 준다.

80년대 레트로 스타일로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비디오 앱도 인기다. OLDV(오엘디브이)라는 어플은 ‘올드스쿨 비디오 캠코더’라는 이름에 걸맞게 촌스러운 구성이 특징이다.

TV화면조정과 같은 효과를 바탕으로 다소 촌스러운 빨간 녹화버튼이 크게 박혀있다. ‘삐-’ 소리를 시작으로 레트로풍 배경음악이 흘러나와 올드함을 연출한다. 글리치(Glitch)버튼으로 멀쩡하던 화면이 버그가 걸린 것 같은 지직거리는 효과도 줄 수 있다.

변신에 성공한 옛스타일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는 곧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옛 감성을 입고 다시 부활하거나 디지털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날로그의 반격>을 쓴 데이비드 색슨은 “디지털의 압도적인 우수성이 아날로그를 쓸모없게 만들었고 아날로그 기술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디지털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좀 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하며, 오히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제품이나 서비스와 소통하길 원한다는 분석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위해 기꺼이 웃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것이 디지털 기술보다 훨씬 번거롭고 값비싼데도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디지털 세상이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의 희소성을 높였다는 주장이다.

이노션 월드와이드 역시 최근 ‘모바일 디지털 홍수 속에서 아날로그가 재조명 받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날로그가 다시 뜨는 이유로 △소비자는 모바일 기기에서 새롭게 재현되는 아날로그 콘텐츠로부터 신선함을 느끼며 △모바일 환경의 편의성과 효율성이 소비자의 아날로그 감각을 부활시키고 △디지털의 무형 콘텐츠가 아날로그적 실물로 구현되며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노션이 인기 콘텐츠 관련 소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사진’(1만2416건), ‘필름’(5822건), ‘카메라’(4962건) 등은 물론 ‘스마트뮤직앨범’(6077건), ‘다이어리’(339건), ‘포토북’(328건) 등 모바일에서 오프라인 형태로 구현되는 콘텐츠 및 서비스와 관련해 관심이 높게 나타났다.

디지로그 움직임은 사라진 LP도 다시 소환했다. 지난 6월 경영난에 문을 닫았던 국내 마지막 LP공장이 재가동에 들어간 것. 마장뮤직앤픽처스 마케팅팀 담당자는 “LP수요가 없어 문을 닫았는데, 다시 바이닐이 인기를 얻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마장뮤직앤픽처스의 바이닐팩토리에서 lp를 생산하고 있다. 바이닐팩토리 제공

LP붐은 국내에서만 불지 않는다. 영국BBC는 지난해 말 처음으로 LP레코드 앨범 판매액이 디지털 다운로드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음향 전문기업인 오디오테크니카도 최근 턴테이블을 출시하며 아날로그 부활에 힘을 실었다. 이전과 달리 턴테이블에 기술을 결합해 녹음, 음원파일 제작도 가능해졌다.

재밌는 것은 중장년층 남성이 주요 소비층이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 LP를 구매하는 10~20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LP를 경험한 세대도 아닐 뿐더러 턴테이블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왜 LP를 찾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이 발매한 LP를 뜯지 않고 굿즈나 소장용으로 간직하겠다는 팬심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날로그 회귀 현상은 다양한 산업계에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사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인 디지로그(Digital+Analog)라는 단어가 유명해진 것은 2006년 이어령 박사가 집필한 <디지로그> 덕분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디지로그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첨단기술을 의미하는 용어’다. 쉽게 말하면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 인간의 감성을 융합해 넣는 것을 뜻한다.

한 경제연구소 소속 ㅅ박사는 “획일화·보편화 이미지가 강한 디지털 시대일수록 개인의 감성, 인간적인 느낌, 개성 등 자기만의 것을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원하는 건 ‘손맛’

0과 1로만 표현되는 디지털과 과거의 향수가 묻어있는 아날로그는 반대 개념 같지만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 주변 기기들에는 익숙한 아날로그 방식이 자연스럽게 적용돼있다.

크레마, 킨들 등의 전자책은 최대한 책과 비슷하게 제작된다. 책 넘기는 속도와 눈에 무리가 가지 않는 화면색을 조절하도록 한 것이다. 매년 최첨단 기술을 탑재해 출시되는 스마트폰에도 인간적인 감각을 구현하는 건 중요한 요소다. 삼성전자 갤럭시노트의 S펜이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디지털 펜을 이용해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게 하는 건 일종의 아날로그적인 UX(사용자환경)”라며 “웨어러블 시계에서도 터치가 아닌 직접 동그란 휠을 돌리도록 한 것도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노트8 tv광고 캡처.

LG의 모든 스마트폰에는 액정을 톡톡 두들기면 화면이 켜지는 ‘노크(Knock)’ 기능이 탑재돼 있다. 마치 방문을 열기 전 노크를 하는 것과 같다. 최근 출시한 V30의 카메라 전문가모드에는 DSLR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입혔다. DSLR의 휠 버튼을 손으로 돌릴 때 나는 ‘드르륵’ 소리와 진동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LG전자 홍보팀 관계자는 “사람들이 DSLR이나 컴팩트 카메라를 쓰는 이유는 직접 만지고 작동하면서 전문가가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라며 “결국 소비자가 원하는 건 ‘손맛’이다. 제품을 기획할 때 아날로그 감성을 입히기 위해 고민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ㅅ박사는 “기술이 상향평준화가 되면서 더 좋은 기술이 나와도 차이를 못 느끼게 됐다”며 “그러다보니 따뜻한 느낌으로 보정해주는 사진필터, 스마트폰의 그립감 등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소비자들이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하나의 제품에서 둘의 특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건 점점 더 고도화되고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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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용 2022-10-13 05:17:23
디지로그 신선합니다. 전문가들의 손 맛이 그것 아닌가 생각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