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공영방송, 그렇게 9년이 지났다
망가진 공영방송, 그렇게 9년이 지났다
  • 이상요 (leesy54@kbs.co.kr)
  • 승인 2017.06.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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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 경찰이 난입했던 그때…언론계 적폐는 여전히

2008년 2월 MB정권이 출범하고 시간이 흘러 유난히 더운 7월 무렵이다. 교양 프로그램 제작을 맡고 있던 당시, 서로 만나기 어려운 드라마 담당 프로듀서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모 본부장이 모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로 갔다.

프로듀서 직종이었던 나는 정책·조직·예산을 담당하던 KBS 기획팀장을 거쳐 프로그램 제작 담당인 ‘KBS스페셜’ 팀장으로 복귀해 재직하고 있었다. 사장-본부장-국장-부장-차장-직원으로 짜여있던 직제를 사장-본부장-팀장-직원으로 개편했던 때였다. 복잡한 중간 단계를 슬림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확보한 현장 인력을 중심으로 조직의 활력을 꾀하자는 취지였다. 기획팀장은 직제상 사장을 자주 만나야 하는 자리였다. 정연주 사장 시절이었다.

2008년 8월 6일 kbs 방송국 본관 외벽에 '공영방송 사수' 플래카드가 내걸린 가운데, 바깥에선 정연주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리는 모습. 뉴시스

사내 분위기는 어지러웠다. 정권이 교체됐으니 정연주 사장의 임기가 2년여 남았어도 당장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노골적이고 거칠게 유포되고 있었다. 권력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일사불란하게 KBS를 압박했다.

그해 5월에 정연주 사장은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KBS와 국세청 간의 법인세 소송에서 자의적인 소송 취하로 2875억원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뉴라이트전국연합, 국민행동본부, KBS·MBC 정상화운동본부 등 3개 보수단체가 KBS에 대해 청구한 특별감사를 받아들였다. 6월에는 국세청이 KBS와 거래하는 외주 독립제작사에 대해 세무조사에 돌입했다. 7월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정연주 사장 사퇴를 반대하던 신태섭 교수의 이사 자격을 전격적으로 박탈했다. 

사장의 법인카드도 이잡듯이 뒤졌다. 사장 축출을 위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무리수라는 비판을 받았던 조치들이었다. 아무리 털어도 잡히는 게 없으니까 감사원은 전 직원의 주민등록 번호까지 요구했다. 이것만은 KBS가 거부했다.

KBS 내부에서도 당시 노동조합이 정연주 사장 퇴진운동을 벌였다. ‘생계형 사장’이라는 모욕적인 언사까지 동원하면서. 간부급 기자들을 중심으로 모 선배를 새 사장으로 영입해야 한다는 모임도 있었다.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이후 기자와 프로듀서들 대부분은 새로운 노조를 설립하면서 노조가 이원화되었다. 기존 노조에는 대부분 행정·기술직군만 남게 됐다.

정연주 사장은 이런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8월에 그는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다. “공영방송 KBS를 향해 거센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정권은 공영방송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사장의 임기보장을 폐기하고, 자신들의 정권적 안위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영방송 사장 ‘해임’이라는 초법적인 조치로 치닫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은 무너지고, 언론의 자유, 그것이 근간이 되는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훼손을 당하고, 역사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2008년 8월 6일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이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감사원의 특감 발표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 발표가 있기 전에 이런 취지의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야 훌훌 털어버리고 그만 두면 홀가분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일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영방송의 독립은 영원히 지켜야 할 가치이고, 나는 그것을 위해 버텨야 한다’라고. 그는 말도 안 되는 동시다발적인 압박에 뚝심있게 저항하고 있었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뿐이었다.

술자리에는 본부장 외에도 몇몇 직원들이 함께 있었다. 자연히 회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닥칠 일들이 화제가 됐다. 약간 취기가 도는데 본부장의 한탄이 들렸다. “사장만 물러나면 이런 회오리가 멈추지 않겠느냐. 사장 자리에 앉은 사람은 유한하지만, KBS는 영원해야 한다. 사장이 버티니까 나를 포함해서 본부장들에게도 개인적 비리를 캐면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그러면서 살짝 귓속말로 나에게 말했다. “네가 사장에게 이런 말을 좀 전해라. 사장과 말이 통하지 않느냐.” 순간 술이 확 깼다. 함께 마시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삐에로들의 군무처럼 여겨졌다. 그런 말을 전달할 수는 없었다. 전달해봤자 듣기나 하겠는가.

이 시기는 KBS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모든 조사에서 KBS 뉴스의 영향력과 신뢰도는 부동의 1위였다.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위원회가 주는 방송대상은 2005년부터 ‘KBS스페셜-도자기’, ‘대하드라마-불멸의 이순신’, ‘특별기획 HD 다큐멘터리-마음’,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가 내리 차지했고, 국제무대에서도 2003년 이후 각종 상을 36건이나 수상했다. 내가 책임 프로듀서를 맡았던 ‘차마고도’ 6부작은 국제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 최종 4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8월 8일, 이사 11명 중 신태섭 이사를 교체해 한나라당 추천 이사를 다수로 확보한 KBS이사회는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을 의결하기 위해 임시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일이기도 했다. 베이징 올림픽에 국민의 관심이 몰려있는 동안, KBS는 수천명의 경찰과 경찰 버스에 포위됐다. 

2008년 8월 7일 저녁 kbs 본관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 촛불집회에서 경찰들이 참가자들을 강제해산시키기 위해 물대포를 준비한 모습. 뉴시스

임시이사회가 열리는 KBS 본관 3층에서 이사회 개최를 막기 위해 농성하던 직원들은 KBS 건물 안까지 들이닥친 300여명의 무술 사복 경찰에 의해 제압당했다. 이날 이사회에서 사장 해임 제청안이 통과됐고, 사흘 뒤 올림픽 개막식에서 돌아온 이명박은 해임 제청안에 서명했다. 해임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는 “KBS가 거듭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례없는 언론사 내부 공권력 투입은 이사회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인 7일 저녁, 유재천 이사장을 비롯한 한나라당 추천 이사 6명은 시내 모 호텔에서 같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10시에 이사회 개최 장소인 KBS로 함께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작전처럼. 표 이탈 방지를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11월에는 외주 독립제작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관련해 본부장 1명이 구속되고, 또 한 명의 본부장과 몇 명의 예능 프로듀서들이 뇌물수수 또는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8월 20일 kbs 신관 앞에서 열린 '부당징계 시도 중단 및 제작자율성 확보를 위한 kbs 전국기자협회 비상총회' 현장. 뉴시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감사원·검찰·국세청·방통위·공영방송 이사회 등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KBS뿐만 아니라 MBC, 연합뉴스, YTN 등 공영 미디어들을 불법적으로 장악했다. 언론인들은 파업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항의했다. 정권은 해고 19명과 440여명에 대한 징계로 화답했다. 이와 궤를 같이 하면서 비판 프로그램은 폐지·축소하고 정권홍보 프로그램은 확대했다.

공영방송 정상화가 시급하다. 불법적인 언론장악의 진상을 규명해 적폐와 부역자들은 청산해야 하고, 해직자와와 부당징계자는 복직과 원상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며, 뉴스와 프로그램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마냥 문재인 대통령에게만 이를 해결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언론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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