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 사고를 넘어 가치관의 회색지대로
강박적 사고를 넘어 가치관의 회색지대로
  • 조요섭 (yscho921021@naver.com)
  • 승인 2017.04.10 18: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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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s 스토리] 버티지 못한 나, 1대 1의 삶도 괜찮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내 성적은 전교 최상위권에 속했다. 자랑은 아니다. 오히려 꺼내면 아프기만 한 과거다. 지금의 내 삶은 어떠한지 나열해보면 극명히 비교된다. 자퇴생, 검정고시 출신, 장애인 그리고 평범한 직장을 다니면서 밤엔 여러 형태의 글을 쓰는 인생….

자연스레 멀어져 연락을 자주 주고받진 않지만 그 당시 나와 비슷한 성적을 받던 친구들의 소식이 틈틈이 들려온다. 명문대 진학은 기본이고 수련의, 교원, 대기업 사원이 되어 건실한 청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다른 인생으로 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친구들은 버텼고, 나는 버티지 못했다.

서울의 한 독서실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뉴시스

약 10년 전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열여섯의 나는 불안이 극에 달해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진로고민을 주절주절 쓰거나,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늦은 밤 도둑고양이들의 자유를 부러워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 내 상황은 이랬다. 나이 터울이 꽤 있는 친형은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은 집안의 자랑이었고 형이 다녔던 종합학원을 다니게 된 나는 자연스레 ‘○○이 동생’이라는 타이틀로 불리며 원장과 강사들에게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잘해야 했다. 어머니의 기대와 형의 이름이 있었기에 최소한 ‘못지않은’ 동생이 돼야 했다.

그러다 고교에 진학한 후 치른 첫 중간고사에서 덜컥 전교 3등이라는 성적을 받아버렸다. 돌이켜 보면 우열 경쟁에서 거둔 승리가 아니라 주변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저 중등과정과 고교과정의 기형적으로 큰 차이를 조금 일찍 깨닫고, 역시 기형적으로 살아남아 보려 했던 열일곱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중간고사 이후 담임선생의 기대까지 어깨를 짓눌러 오자 결국 내 부담은 강박에 이르고 말았다.

매일 캔커피를 2잔씩 마시며 야자시간을 버텨야했고 주말에도 학교에 나갔다. 암기과목이 도무지 외워지지 않아 수십 번씩 읽는 강박증까지 시작됐다. 불안이 증폭될수록 그 해답이 오직 노력일 거라고 굳게 믿으며 휴식없이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 있는 방식을 고수했다. 초등학교 방학기간 때 단어 500개를 온전히 외워내면 학원에서 문화상품권 5장을 쥐어주는 보상에 철저히 훈련돼 있던 나는 파블로프의 개나 다름없었다. 숱한 암기만을 반복해왔기에 효율을 배우지 못했고 정도를 몰랐다. 무식한 반복 끝에 결국 과부하가 걸려 한참이나 병원을 다녀야했고 다음 시험에서 등수가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첫 실패였다.

고3 학생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후 성적대로 배치되는 학교 정독실 자리가 앞에서 뒤로 밀려났다. 집안 분위기도 사뭇 다르게 변했다. 성적 하락을 집안의 우환으로 읽던 담임의 심각한 표정도 실패를 실감케 했다. 이때쯤 눈의 사시 증세가 더 악화돼 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게 됐다. 

결국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아주 외면하게 됐는데 그 당시 겹쳤던 여러가지 가정사는 막론하고 결정적인 계기는 너무도 사소했다. 어머니와 작은 말다툼을 내가 “공부 안 해!”로 끝낸 것이 실제로 실현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상위권에 못 들면 먹고 살 길이 전혀 없는 줄로만 알았다. 당시 내가 느꼈던 교육 풍토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했다. 중고생에게 있어 구체적인 진로란 수능을 치른 후 ‘원서영역’이 시작돼서야 성적에 맞춰서 고르는 것이었다. 진로에 대한 뚜렷한 견지 하나 없이 스물이 되기까지 획일화된 교과과정을 버텨야 하는 게 청소년의 삶이었다. 그런 틀에서 나는 뚜렷한 꿈이 자라지 못했고, 이유없는 공부가 싫어졌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잘 버텨온 이들이 있기에 시시콜콜한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다. 다만 엄연한 인격체인 청소년이 스무 해를 보내기 전까지 진로를 찾기 버거운 24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나의 이야기가 단순한 핑계로 치부되진 않았으면 한다.

돌아온 2학기 어느 날 학교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채 무작정 보수동책방골목으로 향했다. 고교생이 교문 밖에서, 그것도 평일에 쬐는 햇볕이라니. 낯설지만 따뜻했다. 500원짜리 하나로도 헌책을 살 수 있던 곳에서 오랜만에 시간제한이 없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더할 나위없는 자유를 느끼면서 글과 책을 좋아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후로도 책을 향한 탈옥(?)이 수차례 반복되자 검정고시를 치른다는 조건 하에 부모님은 자퇴를 허락해 주셨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공부해오다 무너진 아들놈이 처음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작은 안심이 되어 허락하신 걸지도 모르겠다.

글에 뜻이 생겨 검정고시를 치르고 취직을 준비하면서도 내내 놓지 않았다. 줄기찬 습작을 빚으며 숱하게 도전했고 무수히 실패했다. 가능성을 느낀 적도 몇 차례 있었지만 기약없는 꿈을 지켜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앞날의 미성년일 때와 달리 선택의 자유를 얻게 된 나는 원칙을 정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무작정 올인하지 않는 것, 쉽게 비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일상의 틀은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최대한으로 꿈꾸는 것. 어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게 사회 의제에만 쓰일 거창한 말인가? 개인의 삶에 그것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유엔이 시행한 ‘생애 선택의 자유’ 조사에서 한국은 158개국 중 122위를 기록했다. 아시아에서 최하위였다. 자유는 배제된 채 하루를 숙제처럼 살아내는 우리네 인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내로라하는 학교를 나와 외국계기업에 취업한 한 친구는 요즘 굳게 믿고 배워온 것이 한 번에 무너진 느낌이 든다고 토로했다. 사라진 자유와 존재하지 않는 꿈이 폭로한 슬픈 자화상이 위태롭게 그려진다. 나와 달리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버텼던 대가로는 부족하고 잔인하다.

밤 늦도록 불켜진 한 고등학교. 뉴시스

이런 세태에서 어떤 삶을 택해야 하는가. 부유하지 않은 서민 가정, 확실하지 않은 어설픈 재능에 나는 미련없이 반만 숙제처럼 살고 나머지 반은 무족보 문학도로 살기로 했다. 보수가 적지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직장을 얻었고 그 시간을 꿈에 쓰고 있다. 물론 때때로 버겁다. 이따금 공포도 느낀다. 다만 자유가 생겼고, 삶의 작은 테두리 하나가 만들어졌다. 혹자가 너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물으면, 글 쓰는 일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확고하게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정형적 선로를 벗어난 한 낙오자의 자기합리화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부정하진 않겠다. 다만 꿈이라고 부르기엔 거창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는 당신의 그 무언가를 놓지 않고 꼭 붙들고 가는 것,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마련해 둔 채 희미하고 더디게라도 지켜가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꽤나 뜨겁고 복된 일이라는 것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을 가진다.

강박적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가치관의 회색지대로 가자. 일과 꿈에 얼마만큼의 삶을 배분할 텐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한가지 의견을 덧붙이자면 1:1의 삶이 그리 나쁘진 않다. 행복하다. 지금까지는.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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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17-09-30 17:12:30
요즘 힘들었는데 이 글 읽고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 역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성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고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거든요. 지금 이 글 읽고나서 그런 힘듦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네요.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구요.
좋은 글 감사하고 다음에 쓰실 글도 읽어봤으면 좋겠네요.

딸기맘 2017-04-10 23:16:37
학교에서 학생들을 진로를 가르치는 지라 백번 이해하고 공감됩니다.
힘내시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두번 후회 없이 노력하시길.
그리고 좋은 글 자주 올려주세요.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