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을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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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 승인 2017.03.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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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노화·빈곤·장애 등 사회적 약자 이해하기…생활에서 교육, 마케팅까지

[더피알=이윤주 기자] 고대 로마 작가 푸블릴리우스 시루스는 읽은 건 10%, 들은 것은 20%, 본 것은 30%, 말하고 행동한 것은 90%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만큼 경험이 가장 오래간다는 의미다. 이 같은 명언은 20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유행이 되고 있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체험해보는 프로젝트가 잇따르는 것이다.

지난해 말 일본 정치인 3명이 임산부 체험에 나섰다. 이들은 7.3kg 무게의 임산부 조끼를 입고 생활하면서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직접 경험했다.

이들은 몸을 굽혀 양말을 신거나 장을 보고 회사에 출근했다. 버스자리를 양보 받고 감사해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도는 남성들도 집안일과 육아를 돕자는 의식 개혁을 위해 마련됐다. 배 나온 남성이 끙끙거리고 깨달음을 얻는 바이럴 영상은 큰 이슈가 됐다.

용인시 역시 비슷한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올 상반기부터 ‘미션일파서블’이란 주제로 지역 주민들에게 임신체험키트를 일주일씩 대여해주는 것.

▲ 임산부 조끼를 입은 남성이 설거지, 요가, 잠자기 등을 체험하고 있다. 용인시 처인구보건소 제공

홍사란 용인시 처인구보건소 지역보건팀 관계자는 “육아 교육을 위해 부부출산교실 등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지만 더 심도 있는 학습 방법을 고민하다 임신체험키트를 시도하게 됐다”면서 “보건소에 들러서 잠깐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대여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효과를 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용인시는 임신체험키트를 끼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는 예비아빠를 위해 미션카드도 제공한다. 설거지하기, 무릎 꿇고 걸레질하기, 계단 오르내리기, 잠자기 등 평범한 행동이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경험한 뒤에야 느낄 수 있다.

미션을 완수한 남편은 상(?)으로 아내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수 있다.

“경험은 최고의 스승”

다른 지자체 보건소들도 임산부 키트 등을 마련해 놓고 시민들의 참여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고양시 일산동구보건소 모자보건팀 역시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용인시 사례와 다른 점은 체험 대상이 중‧고등학생이란 것이다.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통해 임산부를 향한 인식을 개선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한 취지다.

그러나 여전히 임산부를 배려하는 문화는 부족하다. 지난해 10월 보건복지부가 임산부 253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임산부로 배려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59.1%로 집계됐다. 나머지 40%는 배려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체험키트 프로젝트는 이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 개선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임산부 뿐 아니라 노약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체험키트 콘텐츠 제작도 활발하다.

최근 부산시에서 제작한 ‘노인의 마음’ 동영상은 온라인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부산시는 국내 도시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빨라 세대 갈등이 심각한 편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노인 분장’ 프로젝트다.

20대 청년이 ‘노인 키트’를 이용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아버지의 탈을 쓴다. 노인으로 분장해 하루 동안 그들의 시각에서 생활하는 체험 프로젝트다. 노인체험용품은 관절 억제 지지대, 시야가 좁아지면서 흐려지는 안경, 근력을 제한한 모래주머니 등으로 구성됐다. 팔과 다리는 뻣뻣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근력도 현저히 줄어 지팡이에 의지하게 된다. 말 그대로 노인을 입은 육체로 변신하는 것이다.

노인이 된 청년은 신호등을 제 시간에 건너지 못해 힘들어하고 자신이 탈 때까지 기다려주는 버스기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만 소외된 느낌을 받고, 노인 사이에서 장기를 구경하면서 자식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자신을 낯설게 보는 20대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영상 속 그는 “노인의 삶은 고단하구나. 내가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될 수 있겠다. 관심을 많이 드려야겠다”고 느낀 점을 나눴다. 영상을 기획한 김수연 부산시 소통기획담당관은 “사회적으로 세대 간 갈등이 많이 대두된다. 단순히 ‘노인도 사회구성원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의 폭이 좁고 공감을 얻기도 어렵다”며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 다세대간의 화합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대리체험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긍정적인 움직임은 계속해서 퍼지고 있다. 최근 지역복지운동단체 복지세상은 ‘빈곤’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미국의 빈곤 시뮬레이션 키트(Poverty simulation Kit)의 한국어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

▲ 미국의 빈곤 시뮬레이션 키트의 구성품. 복지세상 제공

이 키트는 당사자들의 실제 삶을 기반으로 구성한 체험도구다. 26개의 가상 빈곤가구의 가구별 상황 (가족 구성원, 현 상황, 한 달 수입과 주요 지출내역)등이 적힌 가구별 프로필과 소품 등이 들어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병원, 은행, 관공서 등 다양한 자원의 역할안내서가 들어있다.

시뮬레이션은 15분은 1주로 하여 4주간 ‘한 달’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프로필에 적힌 월수입으로 한 달간 생계를 꾸리며 갑작스런 사고, 의료비 지출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는 등 저소득층의 일상을 담았다. 복지세상은 ‘과연 우리가 빈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인식개선을 위한 체험활동으로 이를 채택했다.

지난해 11월 1차 참여자의 소감 중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막막함’이다. 삶의 어떤 부분을 포기하고 다음달을 걱정해야하기 때문이다.

김진영 복지세상 사무국장은 “빈곤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공무원, 시의원 등을 1차 대상으로 체험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빈곤가상체험을 통해 빈곤에 대한 이해 증진은 물론 궁극적으로 빈곤관련 정책이나 제도의 개선, 보완하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초등학생들이 장애를 체험해보는 ‘유니버설디자인 인성·창의체험교육’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때 원하는 학교는 이를 정규교육과정으로도 편성할 수 있다.

이 도구는 가령 손 떨림 현상을 만들고 스푼으로 사탕 떠먹기, 안대를 착용하고 동물의 머리와 몸통을 만들어보기, 사용하는 손에 테이핑한 후 생활용품 따보기, 목장갑을 낀 채 제품을 열어보기 등 소소하다. 직접 경험하고 상대방을 이해해보려는 ‘착한 교육’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성을 배우면서 개선 아이디어까지 디자인해볼 수 있다는 게 서울시 측의 입장이다.

신성만 한동대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지금 사회는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남자와 여자 등 서로에 대해 오해나 갈등이 많다. 서로가 경험했던 트라우마나 의사결정의 배경이 되는 경험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행동을 바꾸는 데 중요한건 체험도 좋지만 근본적으로 교육이나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향기로, 문화로 퍼지는 체험

체험 움직임은 문화 마케팅으로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향기의 미술관> 책이 그 예다. 이 책은 명화작품과 5가지 향수가 함께 실린 명화집이다. 명화를 보면서 향기를 맡아 독자로 하여금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명화를 느낄 수 있는 향수가 들어있는 '향기의 미술관'. 블로거 bernays08 제공

독자는 책을 넘기다 해당 작품이 나오면 시향지에 첨부된 향수를 뿌려 맡으면서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가령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에는 파리 거리의 향이 나고, ‘수련’ 작품에서는 실제로 수련 향이 난다.

책의 작가인 노인호 그레이 더 센트 대표는 뉴욕에서 도슨트를 하다가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림과 향은 한 번에 확 와 닿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 둘이 시너지를 발휘해 독자들로 하여금 후각을 깨워 온 몸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독자들은 눈으로 보는 명화에서 향까지 맡아볼 수 있는 체험형 키트인 셈이다.

1988년 독일에서 처음 시작하고 국내에서도 돌풍이 불었던 ‘어둠속의 대화’ 공연 역시 체험이 문화로 접목된 사례다.

▲ 시각장애를 체험하는 '어둠속의 대화'는 완전한 암흑 공간에서 극이 이뤄진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 공간. 상대방의 소리만 들리는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 8명과 한 조가 되어 100분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참여한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로드마스터의 인솔 하에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이어나간다.

극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한 번 더 놀란다. 자신들을 인솔한 로드마스터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공연을 본 회사원(30세)은 “직접 경험해봐야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오직 청각, 촉각, 후각에 의지해야 하니 옆 사람의 소중함을 알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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