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체험학습’이 필요하다
‘을 체험학습’이 필요하다
  • 이성훈 (ssal123223@gmail.com)
  • 승인 2017.01.25 08: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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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s 스토리] 보상심리보다 강력한 ‘머슬메모리’

사실 군대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20대 남성의 특수한 경험이라 대다수가 공감하기 쉽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무용담, 고생담 등 소재가 뻔해서 지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동안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교훈을 건졌다. 그것은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재벌3세의 폭행사건’ 등을 이해하는데 꽤나 유용했다. 부득이 군대 이야기를 꺼내본다.

군복무 시절, 나의 막내생활은 유독 길었다. 8개월 동안 물주전자 나르기, 청소, 파견훈련 등 온갖 잡일을 떠맡았다.

▲ 지난해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완전히 물에 잠겨 폐허가 된 태화종합시장 복구를 위해 국군장병이 투입된 모습. 뉴시스

선임들은 바쁜 나를 옆에 두고 빈둥거렸다. 혹여 내가 반항심을 가질까 두려웠는지, 수시로 창고로 불러 말투나 태도를 꼬투리삼아 욕설을 퍼붓고 길들이려 했다. 그들은 “억울하면 너도 후임 받아라”고 마무리하곤 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후임 받으면 갑질할 테다!’

8개월 뒤 마침내 후임이 들어왔다. 그때의 해방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후임 앞에서 ‘선임놀이’는 쉽지 않았다.

모든 일을 떠넘기고 소설책을 집어 들었지만 홀로 2인분하느라 진땀 흘리는 후임이 눈에 밟혔다. 막내생활의 피곤함과 서러움을 알기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결국 책을 집어던지고 일손을 거들었다. 몸은 조금 불편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8개월의 노예생활을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에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갑질하고 싶다’는 소망보다 을로서 새겼던 몸의 기억이 강렬했다.

이병-일병-상병-병장-그리고 제대. 그 2년의 시간동안 나는 ‘갑’과 ‘을’을 모두 경험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한 사회의 최하류층에서 최상류층까지 모두 ‘체험학습’할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은 군생활의 독특한 미덕이다.

체득은 아주 강력한 학습수단이다. 영미권에서는 반복된 체험을 통해 교훈을 체득하는 행위를 ‘근육에 새기는 기억(muscle memory)’이라 부른다.

▲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왕자와 거지' 등의 작품으로 친숙한 마크 트웨인이 쓴 책 중 하나. 기사의 특정 내용과는 상관없음. 뉴시스

그들은 ‘머슬메모리’를 책-영상을 통한 간접학습보다 강렬하고 효과적이라고 평가한다.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작품 속에 갑과 을의 역할 바꾸기를 단골로 등장시킴으로써 몸의 기억을 유달리 강조했다.

어느 왕자가 자신을 꼭 닮은 거지소년과 옷을 바꿔 입고 빈민가에서 갖은 고생 끝에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왕으로 거듭났다는 <왕자와 거지>, 중세 영국의 아서왕이 부하의 실수로 노예시장에 단돈 2파운드로 팔려갔다 돌아오고는 즉시 봉건 신분제를 폐지했다는 공상을 담은 <코네티컷 양키>를 읽다보면 유쾌통쾌한 역지사지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그 뻔뻔한 권력자들이 체험학습을 하고, 비로소 제대로 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감’과 ‘염치’는 후천적인 덕목임을 알 수 있다. 사람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학습과 노력으로 길러진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 국정 농단 주범들은 이제 와서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이라며 발뺌하고, 재벌2·3세들은 힘없는 약자들에게 손찌검을 휘두른다.

권력에 빌붙어 아부를 일삼던 언론들, 외국경찰보다도 수사에 소극적인 검찰-경찰고위층도 부패권력과 한 몸이다. 정말로 뻔뻔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대목이 있다.

과연 최순실의 부릅뜬 눈과 박근혜의 신세한탄은 진심일까, 연기일까? 이들을 변호하고 보호하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정작 갑들은 자신들의 부당행위가 ‘갑질’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크다. 갑으로 올라서기까지 과정에서 ‘을’과의 만남과 소통을 배제한 탓이다.

재벌 후손들은 귀족처럼 자라다가 재벌1세대의 성과를 그대로 물려받고, 사법·행정·언론 엘리트들은 골방에서 수년 간 세상과 격리된 채 그저 학문만 익히고 출세한다.

워낙 세상물정을 모르다보니 시민들을 내쫓으면서까지 의전을 즐기고, 기차표 한 장도 제대로 뽑을 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의 격차 탓에 세상 사람들이 ‘뻔뻔하다’고 지적해도 갑들은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양극화 해소를 위해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어느 신년연설에서 “1년에 1600만원(1만4500불)으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들이 직접 그렇게 살아보라”고 말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왕자가 거지생활을 체험하고 나서 빈자의 배고픔에 공감 했듯, 갑이 을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직접 을이 되어보는 것 아닐까?

세계적인 리더들은 한결같이 ‘체험학습’을 통해 리더십을 키웠다. 중국의 정치엘리트인 시진핑, 리커창, 왕치산 등은 최하층 관료 시절 배고픈 농촌으로 ‘하방’된 쓰라린 경험에서 중국의 극심한 양극화 문제에 공감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의 존경받는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도 실무능력과 공감능력을 키우도록 후계자들을 말단 사원으로 오랫동안 파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세상을 호령하는 갑이 보는 세상과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을이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서로의 위치를 바꿔볼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재산을 상속하고 권력을 손에 쥐기 전에 ‘을 체험하기’를 일종의 통과의례로 두는 것은 어떨까.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 검경 고위급, 고위공무원, 재벌3세, 언론인 등 체험학습이 시급한 ‘갑’들이 너무도 많다.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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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2017-07-26 20:17:23
기자님 글 잘읽었습니다. 거지체험할려고, 키워드 검색을 하니깐 기자님 기사가 뜨네요. 비록 관련없는 내용이었지만, 체험을 통해 성장한다라는 요점은 잘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성훈 기자님이 20대의 끝자락에 미디어 스타트업을 한다는 도전정신은 감탄스럽네요. ㅎㅎ 언제나 행복한 하루되세요. 혹시나 거지체험에대해 궁금하신거 있으시면 rjtp5670@naver.com 으로 연락주세여 !! [카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