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가 ‘PR윤리’도 죽였나
가습기 살균제가 ‘PR윤리’도 죽였나
  • 강미혜 기자 (myqwan@the-pr.co.kr)
  • 승인 2016.05.0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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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전달자’ 역할...“비즈니스적 판단으로 업의 본질 간과했다”

“1년 동안 저 (살균제) 통을 가지고 그걸 부어주면서 내 자식을 죽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까 너무 소름이 돋더라구요. 저한테도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고… 우울증이 심할 때는 아침에 눈 뜨면 밤에 잠자기 전까지 어떻게 죽을까 방법을 생각하며 살 때도 있었어요.”

[더피알=강미혜 기자] 3년 전 영상에서 11살 성준이 엄마는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섹섹’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준이는 평생 산소통을 끼고 살아야 한다. 혼자서 학교를 갈 수도, 머리를 감을 수도 없는 아이. 14살이 된 성준이와 그 가족은 지금도 법적투쟁을 벌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 대한 검찰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최대 가해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수년 간 모르쇠로 일관해 온 옥시가 책임을 회피하려 새 법인을 세웠다는 의혹, 관련 연구결과를 조작·은폐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정부의 피해자 조사에서 확인된 사망자 146명 중 무려 103명이 옥시 제품 사용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안무치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화난 여론에 기름을 끼얹은 건 사측의 태도다. PB상품 제조·유통사인 롯데마트와 홈플러스가 사과문과 함께 피해보상 방침을 밝혔을 때도 옥시는 묵묵부답이었다. 뒤늦게 언론에 배포한 입장자료는 사과가 아닌 변명에 가까웠다. (관련기사: 침묵 깬 옥시, ‘사과’ 표현 썼지만 내용은 ‘해명’) 

여기에 피해자들의 집단 폐손상 원인이 ‘봄철 황사나 꽃가루에 의한 것’이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공분을 더했다. 급기야 옥시는 2일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한국법인장인 아타 샤프달 대표가 직접 나서 사과와 보상방안 등을 발표했으나, 피해자 가족의 울분과 돌아선 여론을 좀처럼 돌려세우지 못하고 있다. 

▲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옥시레킷벤키저 한국법인장 아타 샤프달(오른쪽) 대표가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는 중 피해자 가족에게 강력히 항의받고 있다. 뉴시스

비난도, 이해도 안되는 ‘무리수 홍보’

도덕적 해이의 민낯을 드러낸 옥시도 문제지만 그런 회사의 홍보를 맡고 있는 PR회사의 윤리성도 의심되긴 마찬가지다. 현재 옥시의 기업홍보는 대형 PR회사인 P사가 맡고 있다. 진정성이 없는 사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옥시의 ‘이메일 입장문’도 P사가 배포한 것이다.

옥시의 홍보 과정을 지켜보는 업계 종사자들의 반응은 “비난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도 없다”로 요약된다. 한 PR회사 대표는 “회사마다 처한 상황과 입장이 다르니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잘잘못을 따질 순 없을 것 같다”고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자사에 대입시킨다면 “(홍보를) 안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른 PR회사 관계자는 “헬스를 중시하는 철학을 가진 PR회사가 담배나 주류 홍보를 안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듯, 가치를 생각해야 하는 PR회사라면 핵심 이해관계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기업의 관계개선을 돕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옥시의 ‘무리수 홍보’는 위기관리 측면에서도 마이너스 효과를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또다른 PR회사 대표는 “위기발생 시 법의 논리와 여론 사이에서 조율자가 되지 못할 바에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관리과정 자체에서 빠지는 게 순리”라고 했다.

아울러 “(옥시 측이 배포한) 보도자료 문장과 내용을 보면 PR회사가 작성한 것이라기보다 명확하게 법무적 판단, 즉 로펌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읽힌다”며 “여론의 반발을 예상 못했을 리 없는데도 (단순히) 전달자로서 기능함으로써 고객사도 피해자도, 심지어 본인들에게조차 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구를 위한 위기관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꼬집었다.

▲ 가습제 살균제 사망과 관련해 옥시레킷벤키저가 21일 언론에 배포한 공식 입장 전문.

사과 기자회견의 ‘의전’에 대한 쓴소리도 제기됐다. 한 PR전문가는 “신제품 발표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망사건을 놓고 사과하는 자리가 어떻게 6성급 호텔(=콘래드)이 될 수 있느냐”며 “잘못을 했으면 (피해자 눈높이로) 내려와야지… (대응 과정상) A에서부터 Z까지 제대로 된 게 없다”고 비판했다.

물론 계약으로 맺어진 비즈니스적 관계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옹호하는 쪽도 있다. 한 PR회사 대표는 “개인적·윤리적 잣대를 대면 (홍보대행을) 하지 말아야겠지만, CEO로서 경영적 판단을 해보면 무조건 비난할 순 없는 같다”고 속내를 전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속성상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PR가치에 대한 본질적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옥시의 대변자로서의 홍보활동은 ‘공중관계’라는 PR(Public Relations)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비즈니스적 판단이 앞선 나머지 업의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이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지난 5년 간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이 우리사회 여론에 끊임없이 호소해왔다. 그 시간의 무게감을 책임감 있게 소화할 수 있는 PR조직, 전문가가 아니라면 비즈니스적으로라도 접근해선 안 된다”며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잘잘못을 따질 사안이 아니라, PR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소송 과정에서 PR회사 역할을 로펌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 따져 봐도 로펌의 어마어마한 수임료와 비교되지 않는다”며 “그래서 PR은 윤리성과 도덕성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몇 푼 안 되는 돈보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PR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점을 강조했다.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살인기업 옥시규탄 및 옥시 상품 불매운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김찬석 청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PR회사가 의사결정과정에 어느 정도 참여했는가를 따져볼 필욘 있다”면서도 “대외 커뮤니케이션이 PR이 본래 추구하는 상생적이고 상호지향적 가치와 거리가 멀다면 그 일을 함께 한 PR회사도 (사회적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늘 윤리성과 투명성, 진정성을 얘기하곤 하는데 100명 넘게 사람이 죽었음에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부도덕한 기업 입장을 PR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며 “한국 시장과 소비자를 무시하는 기업에 대해선 우리사회에 발도 못 붙이도록 대국민 홍보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대변자로 나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고 일갈했다.

이 관점에서 ‘메시지 전달자’라는 역할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시선도 존재한다. 이병일 HBA 대표는 “PR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개선하는 활동”이라며 “저널리즘이 팩트와 팩트가 아닌 것을 체크하듯, PR 역시 사실관계를 따져 홍보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 측면에서 옥시의 홍보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 한 약국에 '옥시 불매운동 동참으로 옥시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있다'는 문구가 붙었다. 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유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항상 최고의 제품을 홍보할 순 없지만 적어도 거짓을 홍보해선 안 된다는 게 기본 중의 기본 원칙”이라며 “거창하게 PR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결격 사유가 있는 홍보를 맡은 선례는 비즈니스적으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옥시 사태는 이제 전국적 제품 불매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저희 약국에서는 OXY(옥시)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여 <스트렙실>과 <개비스콘>은 판매하지 않습니다. 살인 가습기 살균소독제 제조회사인 옥시는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배상하여야 합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약국 계산대에 붙어있는 이 글은 어쩌면 PR인에게도 직업윤리를 캐묻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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