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취’입니다 존중해주시죠
‘개취’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 승인 2016.02.2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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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소비 트렌드 관통하는 이름, ‘취향’

[더피알=이윤주 기자]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여행, 음식, 의류, 화장품, 공연, 운동 등 개인 취향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가 없다. 이쯤 되면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은 동음이의어로 봐도 무리가 아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게시물 앞에 [개취존중]을 달거나 ‘취향저격 당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자는 개인의 개성을 존중해달라는 표시고, 후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하는 말이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아예 ‘취향저격’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책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또 취향이 직업이 된 ‘테이스테셔널(taste+professional)’이 등장하는 등 개인의 선호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 부쩍 많아졌다.

과거 우리사회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대신 남과 섞여 어울리며 유행, 베스트셀러, 트렌드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추세는 바뀌었다. 자신만의 개성과 기준을 갖고 소비, 취미,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색취향을 가졌더라도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고수한 채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칸트는 “취향에 따라 자신을 내보이려는 것은 사회적 상태, 곧 커뮤니케이션을 내포한다”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금은 취향이 곧 자신을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시대다.

온·오프라인 넘나드는 취향공동체

취향에 남녀노소가 가지는 고정관념도 사라졌다. 다 큰 성인이 색칠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장난감을 조립해 수집하는 것은 이미 놀랍지도 않다. 이밖에도 “이런 걸 왜해?”라는 질문이 절로 나오는 이색취미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개취존중’ 정신은 필수다.

취향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마트 시대에 굳이 자판을 꾹꾹 눌러 텍스트를 입력하고, 은행 어플을 포함한 여러 편리를 과감히 포기한 블랙베리 유저들이다.

한국에서 블랙베리 회사가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구매대행을 할 정도로 취향에 있어 확고함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소수 블랙베리 유저들끼리의 동질감은 강하다. 지하철에서 같은 기종을 보면 서로 눈웃음을 짓기도 한다.

블랙베리 유저들의 모임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인 ‘책더듬이’도 한 예다. 그들은 BBM(블랙베리 메신저)을 통해 읽은 책의 쪽수와 느꼈던 생각들을 매일 공유한다. 가끔 오프라인으로 모임을 가져 책 선물, 블랙베리 최신 동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한 회원은 “혼자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관련된 모든 행동)하면 금세 지치기 마련인데 공동체가 존재함으로써 개인이 더 표현되고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시계방향으로) 블랙베리 유저들의 ‘책더듬이’ 모임에서 찍은 인증 샷, 젠탱글이 취미인 전은미씨의 작품, 눈이번쩍 영화방에서 ‘그리고 싶은 것’을 상영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나는다큐모임’은 여러 활동을 통해 그들만의 다큐적 취향을 유지해가고 있다. 한 달에 한번 서울 녹번역 인근의 반짝반짝 사진관에서 ‘눈이번쩍 영화방’을 연다.

지난 1월 22일에는 사진관 흰 배경을 스크린 삼아 ‘그리고 싶은 것’이라는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도 했다. 이날은 지역에 거주하는 아동심리상담가, 회사원, 커피집 주인, 블로거 등이 모여 작품을 감상한 후 감독과의 대화와 각자 느낌 점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다큐모임만의 특별한 점은 또 있다. 다큐가 시작되기 전과 후, 각각의 개인 사진을 찍어준다는 것. 상영 후의 달라진 마음을 사진으로 비교해보자는 취지다. 신나는다큐모임의 회원 최종호 씨는 “극장에서는 특정 상업영화만 독점하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가 상영되기 어렵다.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는 분들이 자기 영화를 보여줄 기회가 없다”며 “우리끼리 힘을 내보자라는 마음으로 신나모를 자체적으로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the kooh(덕후) 7호 표지.

취미에 취향을 곁들인 모임도 있다. 젠탱글 동호회는 펜으로 패턴을 그리는 사람들이 모였다. 색을 칠하는 컬러링북과는 다르다. ‘선(zen)’과 ‘엉키게하다(tangle)’라는 두 단어의 조합인 젠탱글은 패턴의 반복을 이용해 작품을 그리는 것이다.

이 패턴을 따라 그리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에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끄적거림에 몰입하게 된다. 비행공포증의 한 여자는 진정제를 먹지 않고도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이유가 젠탱글 덕분이었다는 후기를 전하기도 했다.

취향을 저격한 독립출판물이 창간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미스터리와 히스테리아라는 단어를 결합해 ‘미스터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미스테리아> 잡지가 그러하다. 창간호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온라인 서점에서 문학 부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숨겨왔던 자신의 덕질을 공유하고자 만들었다는 독립잡지 <The Kooh>(덕후) 또한 10권을 모으면 ‘십덕후’가 된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출판물 모두 비록 소수의 관심으로 시작했지만 꾸준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 자신의 사비를 털어 잡지를 창간해 그들의 세계를 확고히 쌓는 데 일조하는 일명 취향마니아들이다.

입맛대로 모아드려요

소셜네트워크는 취향 시대의 연결다리와 같다. 자신의 기호와 맞는 사람들을 찾아 공동체를 이루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특히 SNS를 기반으로 한 ‘해시태그(#)는 일등공신이다. 해시태그는 소셜 상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키워드를 모아 소통 망을 만든다. 이를테면 ‘#먹방’ 태그를 다는 동시에 관련된 콘텐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는 관심 있는 소식과 추세를 간편하게 모니터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같은 흐름에 대해 전미영 서울대 트렌드분석센터 교수는 “나이·성별·직업·학력 등으로 분류했던 인구통계학적 기준인 시장세분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진다”면서 “이젠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는 취향이란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겨야 한다”며 그들이 기업의 새로운 타깃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서로 연결되는 욕구가 취향공동체를 낳았다면, 이것을 소비의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취향소비자’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거리 곳곳에 편집숍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편집숍은 한 가지의 브랜드만 판매하는 전문점이 아닌, 여러 종류의 브랜드와 디자인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가게를 의미한다. 나만의 차별성을 가지고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녹아있다.

이태원에 자리 잡은 나만의 향수를 만들어주는 니치향수 편집숍도 ‘다품종 취향저격’ 아이템들이 있는 곳이다. 니치향수를 자주 찾는 20대 여성은 “향수는 옷만큼 계절감도 많이 타고 자기 개성을 표현하기 좋은 아이템”이라고 만족감을 표했다. 향수뿐 아니라 커피, 패션, 뷰티, 가구 등 나만의 취향은 전반적인 소비 시장에 퍼져있다.

▲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취향저격’코너.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개성에 눈뜬 2030 세대들이 확산되고, 4050 세대도 취향에 입각한 소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기업들도 대응하고 있다”며 “취향이 사회, 문화, 소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개인의 기호가 중요해질수록 기업은 (마케팅하기) 더 어려워진다. 과거처럼 하나를 만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팔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다수를 대상으로 매스 마케팅 전략만으로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제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브랜드라고 해도 집중하지 않는다. 보다 세밀화 된 관심사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광고와 판매 전략이 요구된다. 해시태그, 소비 트렌드, 성향 등을 모은 빅데이터를 통해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춘 기호를 찾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와 관련,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는 “시장이 작더라도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취향에서 새로운 비즈니스가 탄생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취향소비자의 힘을 간과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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