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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쉬하다 탈탈 털린다

기업 겨누는 익명 커뮤니티의 칼끝

기사승인 2016.01.20  10:54:17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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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피알=이윤주 기자] 화장실칸의 낙서로 속마음을 낱낱이 고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화장실 끄적임은 익명 커뮤니티로 옮겨졌다.

두산인프라코어의 ‘20대 희망퇴직’, 대한항공 ‘땅콩회항’, 스타벅스의 ‘별거지’ 사태까지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여러 사건들이 오르내렸다. 기업들의 단면이 알려져 사건화 되기까지, 그 시작은 한 익명 SNS 앱이었다. (관련기사:“갑질 이슈·익명 SNS 경계주의보”)

   

영화 <베테랑>에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니 문제가 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기업은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외부적으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부조리를 알리는 짧은 글 하나가 기업의 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해 말 두산그룹은 계열사 두산인프라코어가 경영악화를 이유로 갓 입사한 20대 직원들에게도 정리해고와 다름없는 희망퇴직을 권고해 큰 논란이 됐다. 수년 간 젊은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광고캠페인으로 호(好)이미지를 쌓아올린 두산의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는 순간이었다.(관련기사: 6년 공들인 두산 광고, 희망퇴직 이슈로 ‘조롱 패러디’)

논란의 시발은 ‘블라인드’라는 이름의 앱. 이는 회사동료 및 동종업계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익명 커뮤니티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큰 당혹감을 안겼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의 트리거도 이 앱이었다.(관련기사: ‘비행(非行)’이 돼버린 ‘비행(飛行)’, 누구 책임인가?)

   
▲ 두산인프라코어 명예퇴직 논란을 불러일으킨 익명 글(왼쪽)과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를 촉발시킨 고발성 글. 사진: 블라인드 앱 화면 캡처

떠오르는 가면무도회

직원들은 익명이라는 망토를 두른 채 기업의 속살에 대해 기탄없이 얘기한다.

블라인드는 회사 메일 인증을 통해 동료들끼리 익명으로 대화하는 ‘우리회사’, 같은 업계 사람끼리 소통하는 ‘라운지’ 두 가지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벤트성으로 ‘웜홀 라운지’ 게시판이 열리기도 한다. 이는 주어진 몇 시간 동안 모든 업계 사람들이 한 곳에서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블라인드는 한 기업의 30명 이상 직원이 신청을 하면 기업 로고를 변형해 ‘라운지’라는 단어를 만든 후 페이스북에 올린다. 당신의 기업도 열렸음을 알리는 것이다.

정영준 블라인드 공동대표는 “별 것 아닌 일에도 외부로 보이는 것만 신경 쓰다 보니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편견 없는 소통을 하고 싶다”고 앱을 만든 배경을 설명했다.

블라인드는 ‘신뢰도’와 ‘익명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회사 이메일만 인증하면 가입이 가능하다. 정 대표는 “익명성을 가장 잘 보존하려면 누가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메일조차도 원래 모양대로 볼 수 없게 연결고리를 다 끊었다”고 밝혔다.

   
▲ 브랜드명을 변형해 라운지 오픈을 알리는 블라인드. 사진:팀블라인드 페이스북

자연히 정제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이 올라오는데, 일각에선 의도적인 비방글이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회사 이메일 자체가 밥벌이와 연관이 돼 콘텐츠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면서도 “어떤 사실이 올라오면 결국 회사 사람들끼리 있다는 전제가 있어 팩트 확인이 가장 빠르다”고 말했다. 

블라인드와 비슷한 직장인들의 익명 공간은 더 있다(관련기사: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익명 SNS’ 뜬다) 

트위터의 ‘○○ 옆 대나무숲’이 대표적. 해당 업종의 종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트위터에 외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이다. 오픈 계정으로 누구나 로그인할 수 있다. 이른바 현대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부활인 셈이다. 다만 트위터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됐다.

‘잡플래닛’은 국내 기업의 리뷰, 연봉, 면접 정보 등을 공유하는 익명 소셜미디어다. 미국의 익명 직장리뷰 사이트 ‘글래스도어’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현재는 구직이나 이직을 도모하는 직장인들의 핫 플레이스로 평가받는다.

현대판 대나무숲으로

기업 관련 익명 커뮤니티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익명의 힘이 부정적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커뮤니티가 문을 닫은 사례도 적지 않다.

2013년에 생성돼 지난해 6월 폐쇄한 ‘꿀위키’가 대표적인 예다.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로 시작한 꿀위키는 사용자들이 늘어나면서 게임, IT회사 등의 뒷담화 장이 됐다. 점차 특정 회사에 대한 추측성 글과 허위사실이 올라오면서 일시 폐쇄하는 부침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오픈한 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영구적으로 문을 닫았다.

익명 커뮤니티의 또다른 문제는 직원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는 데 있다.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일반화해 말하는 과정에서 기업 전체를 단죄, 비판, 평가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때로 채선당 사건과 같이 사실을 확인했더니 반전 스토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반면, 개인 서비스지만 콘텐츠 관리에 좋은 예를 보여주는 익명 앱도 있다. 일기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받는 ‘어라운드(AROUND)’다. 어라운드는 익명 앱 중에서도 청정한 게시판으로 유명하다.

다만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글을 게시할 수는 없다. 자신의 글을 보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야 한다.

그리고 댓글에 공감이 달릴 때마다 ‘버찌’(일종의 포인트로,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유사함)를 받는다. 그 버찌를 사용해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하는 것. 이러한 방식을 통해 콘텐츠는 자생적으로 관리가 된다.

기업들의 눈치게임

익명성에 기대 기업 내부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치는 장이 곳곳에 마련되면서 기업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외부 고객관리 못지않게 이제 내부 고객관리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직원 개개인의 말과 행동이 회사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두산인프라코어 명예퇴직 논란 이후 박용만 두산 회장이 신입사원에 대한 보호조치를 발표했다. 사진: 연합뉴스TV 캡처

실제 관리되지 못한 직원들의 말실수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기도 한다.

지난 3월 스타벅스는 일부 매장 직원들이 충성고객을 비하하는 내용을 블라인드에 게재하면서 엄청난 후폭풍을 견뎌야 했다. 누군가가 해당 내용을 캡처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삽시간에 대형 이슈로 번졌고, ‘스벅 마니아’들은 분노했다. 일부 고객은 불매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스타벅스 코리아 측은 두 차례에 걸쳐 공식 사과문을 올리는 등 사태를 진화하는 데 애를 먹었다. 

내·외부에서 터지는 사건의 ‘배후’(?)에 익명 커뮤니티가 자리한다는 사실을 안 기업들은 ‘앱 단속’에 나서기도 한다. 실제 대한항공은 ‘땅콩회항’ 사건이 불거진 직후 블라인드 사용 자제를 당부하는 공지를 띄웠다. 포스코도 지난해 2월 그룹 전체 이메일을 통해 블라인드 가입을 금지시킨다는 내용을 전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직장인들의 ‘가면무도회’ 열기는 뜨겁다. 블라인드에는 현재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영향력 있는 기업들을 포함한 총 971여개에 달하는 기업의 라운지가 열려있는 상태다. 삼성은 지난해 11월 뒤늦게 합류해 13곳의 삼성계열사 라운지 문을 개방했다.

“사라지거나 진정한 아고라가 되거나”

익명성은 양날의 칼이다. 쓰이기에 따라서 이로울 수도, 해로운 사건을 몰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공유와 속마음을 터놓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다.

   
▲ 익명성에 기대 무분별한 고발성 글이 떠도는 데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자료사진)

블라인드를 사용하는 한 직장인은 “가면을 쓰면 용기가 나는 것처럼 익명 앱 안에선 거침없이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속한 회사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에 익명이란 가면을 빌린다고 귀띔한다.

반면 익명성에 기대 무분별한 고발을 하는 데 따른 우려의 시선도 있다. 또다른 사용자는 “가끔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도 많다”며 “이 글을 쓴 사람이 내 옆자리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나 역시 언제든 도마 위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솔직히 좀 무섭다”고 했다.

전문가 역시 익명 커뮤니티에는 긍·부정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한상기 소셜컴퓨팅 연구소장은 “익명성은 투명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누구나 감시자가 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면서 “그럼에도 자경주의라는 말처럼 문제가 생기면 경찰, 사법부 등 사회적 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하는 움직임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익명 커뮤니티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은 “불만을 얘기할 수 있는 공간과 제도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좋은 기업은 내부적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장치가 있지만 국내는 그런 곳이 많지 않다”고 자유로운 소통이 단절된 기업들의 구조적 문제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 소장은 “익명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부정적 이슈는 기업에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며 “결국 익명의 힘에 눌려 사이트가 사라지거나 진정한 의미의 아고라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윤주 기자 skyavenue@the-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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